특별기고 - 장흥 용강사(龍岡祠) 월산재(月山齋)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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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장흥 용강사(龍岡祠) 월산재(月山齋)를 아시나요?
  • 장강뉴스
  • 승인 2024.10.0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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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문병길
문병길

 

우리 장흥은 많은 충, 효, 열녀물이 산재되어 있어 「충효의 고장」, 「문림의향」 고을이라 칭한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참된 삶과 가치관을 알리고자 한다.

용강사(龍岡祠) 월산재(月山齋)는 장흥군 용산면 용안로 307-16(모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1882년(용강사), 1824년(월산재)에 창건했다.

월산재(강당)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1984년 2월 29일 지정)로 지정되어있다.

이 원사는 장흥읍에서 국도23호선을 30여분 차량으로 운행하면 3거리(용산면 모산리 입구)에 도착한다. 그곳 도로변에 <용강사(龍崗祠) 월산재(月山齋)>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좌측 외딴 곳에 월산재와 용강사가 자리하고 있다.

월산재 뒤편에는 용강산(龍岡山)언덕이며 앞으로는 월내천(月內川)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그 주위에는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풍광이 수려하여 조선조 순조 때 임(任)씨, 최씨가 살던 곳이었으나, 1824년에 영광김씨 김몽흠(金夢欽,1764~1832)과 김상철(金尙澈,1776~1859)선생이 주도하여 매입하고 학문하는 서재(글방)인 월산재를 창설했다.

현재 건물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높은 윗부분에 사당인 용강사(정면 3칸, 측면 1칸)가 자리하고 그 아래에 강당인 월산재(정면 6칸, 측면 3칸)가 있으며, 강당 앞으로 내삼문(百源門), 외삼문(扶綱門), 관리사와 창고가 있다.

월산재(月山齋)명칭은 앞의 산이 반월형 같다하여 산은 월산(月山)이요, 냇가는 월내천(月內川)이라 부르는데서 연유했으며, 월내서재 또는 낙영재(樂英齋)라고도 한다.

월산재 건물에 현판을 낙영재(樂英齋)라고 걸었는데, 그 명성이 차츰 알려져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정면에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크고 웅장한 글자와 낙영재(樂英齋)와 월산재(月山齋)글씨가 새겨져 있는 현판과 주련(柱聯)이 있으며, 영광인 김서국(金瑞國,1804~1859)과 청풍인 김평묵(金平默,1819~1891)의 <낙영재기(樂英齋記)> 및 후손 김서국<용강팔영(龍岡八詠>과 후손 김우(1833~1910)<용강구곡운(龍岡九曲韻)>등 6점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어 이곳이 유학(儒學)을 배우고 익혔던 학습공간임을 방문자들은 깨닫게 된다.

특히 역대 장흥부사(종3품직)들도 이곳 월산재을 찾아와 학문을 장려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는 생도들을 격려했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월산재 뒤편에 장흥부사 송기로(宋綺老,1830~1898)의 내방했던 비석과 후손 김한무(金漢茂,1900~1968)가 쓴 비석(忠孝之風 山高水長)이 세워져 있다.

이는 곧 선조의 충효정신을 계승하고 후대에게 선조의 고결한 정신과 인품을 전승시키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월산재를1891년과 1936년에 중수했는데 훼손되어 1995년에 장흥군 지원금과 문중의 헌성금으로 전면 보수해 오늘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882년(고종19년)고을 유림들의 의론으로 현 위치에 건립한 용강사 사당에 난옹(懶翁) 김광범(金光範.1571~1647.김찬:金瓚-김필선생 형님)의 후손, 우수당(愚叟堂) 김상범(金尙範,15831643.김광범 둘째동생), 뢰수당(牢睡堂)김성범(金聲範,1588~1666.김광범 막내동생), 죽옹(竹翁) 김정서(金鼎瑞,1651~1732.김광범 양손자), 학남(鶴南) 김우(1833~1910.김상범 7세손)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괄(李适,1587~1624)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웠으나 불만이 있어 1624년에 한양을 점령하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난용 김광범 선생은 김여원(金汝源), 정명열(丁鳴烈), 위정훈(魏庭勳)등과 함께 이괄의 난을 진압하려고 의병과 군량을 모아 충청도 충주에 이르렀는데 이괄의 반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아들인 군량을 관가에 납부하고 의병들과 함께 돌아왔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침랑(寢郞)벼슬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안했다.

그리고 어버이 상(喪)을 당함에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며 끼니를 죽으로 때우고 슬퍼함을 이기지 못하고 1647년에 77세 나이로 세상을 마치니, 1661년(현종2년)에 고을 유림 위정훈(魏庭勳.1578~1662,위덕후의 아들), 정남일(丁南一.1588~1640.정명열의 아들) 등이 난옹 김광범 선생의 충효를 천거해 현종 임금이 친히 관원을 보내 쌀과 고기를 내리고 3형제(김광범, 김상범, 김성범)에게 충신, 효자가 난 집이라 하여 호역(戶役)을 면제했다.

난옹 김광범 선생과 우수당 김상범 선생 형제간에 읊었던 시가 전하고 있다.

김광범이 “늙으신 어버이가 다시 젊어진 것을 누구의 정성인가. 아우가 정성을 다해 잘 봉양하기 때문이지. 눈 속에서 오이를 얻은 일은 세상에 드문 일. 대문 앞에서 꿩을 잡음도 하늘이 정성을 알기 때문이지(親老更少是誰誠 善養年來盡弟誠 雪裏摘瓜稀世事 門前抱雉出天誠)라고 읊자

동생 김상범이 화답하기를 “겨울 눈 속에서 오이를 얻은 일을 어찌 정성이라 말씀하십니까? 봄에 수풀에서 귤을 얻는 것은 가장 큰 정성이지요. 어버이를 위하여 때가 아닌데 자라 물고기를 구한 형님의 정성이야 말로 진성한 효성이 아니겠습니까”(冬雪得瓜豈謂誠 春林摘橘最眞誠 爲親兼進非時鱉 舍伯精誠是孝誠)라고 읊었다.

※자료출처: 장흥의 서원과 사우(2012년 윤수옥 편저, p.152)

필자는 장흥군청에 재직하면서 월산재 보수 등 유교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장흥 남부지역 유교문화 테마관광코스를 아래와 같이 구상한다.

용산면 모산리 월산재(전남도 문화유산)→관산읍 방촌 진서대장군석(국가 문화유산)→관산읍 삼산리 경주이씨 2세 충효문(향토문화유산)→회진면 대리 김해김씨 3세 충효려→대덕읍 연지리 왕비사당→관산읍 죽교리 죽천사(전남도문화유산)→관산읍 옥당리 장천재(전남도 문화유산)→관산읍 당동마을 정안사(공예태후 任씨 관련유적)→용산면 차동마을 충열사(사액서원) 및 진주정씨 3세 충효문→안앙면 기산리 기양사→장흥향교(전남도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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