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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은 어젯밤 서당에서 천자문을 강 바치느라 혼이 났다. 간신히 외우고 첫닭이 회칠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시작한 친구들 보다 훨씬 앞서서 강 바쳤다. 더듬거렸지만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어렵게 통과했기에 기분이 좋았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몹시 피곤하여 늦잠을 잤다. 꿀맛처럼 달콤한 수면에 빠져 날이 밝은 줄도 몰라 일어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에는 방 안에 박명이 가득 담겨있었다.
“운현아,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아직도 자냐!”
명진은 마당을 쓸다가 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일어나서 집안일을 해야 할 시간인데 빗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몸이 아프지 않나 하여 걱정이 되었다.
“아니오. 일어났어요.”
운현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하품을 토해냈다. 몸이 나른하여 다시 눕고 싶었다.
“빨리 나와 소죽을 쑤어야지. 소가 배고파서 죽게 생겼다.”
명진은 성질을 부리며 재우쳤다. 소는 식구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봄에 잘 먹여 튼실하게 만들어 놓아야 되었다. 농사철에 논밭을 갈고 다른 일을 시키려면 허약해서는 안 되었다. 품삯을 받고 남의 집 논밭도 갈아주어야 되었다. 농번기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혹사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운현은 마지못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에서 나갔다. 눈을 비비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찬란한 햇빛이 눈동자에 박히며 가시처럼 찔러댔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소학교에 보내주라고?”
명진은 빗자루를 들고 마당 가운데에 서있었다. 방에서 나온 아들을 바라보며 꾸짖었다. 가난하여 먹고 살기도 어렵다는 현실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죄 없는 자식에게 화풀이 하고 있었다.
“덕기도 다니는데….”
운현은 고개를 숙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화를 내니 괜히 서러워 울고 싶었다.
“남이 다니니까 시샘이 나서?”
명진은 자식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장손이라 집안의 대들보였다. 살림형편은 말이 아니지만 잘 가르쳐 큰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어머니와 처자식 모두 칠팔 명이 되었다. 자식들이 다섯에 갓난애까지 있었다. 먹을거리가 없어 살기가 어려웠다. 비렁뱅이처럼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니면 안 됩니까?”
운현은 당당하게 대거리했다.
“…….”
명진은 아들의 기세에 눌려 할 말을 잃었다.
“일본사람인 과수원집 주인도 아는 것이 재산이고 힘이라고 하면서 꼭 소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하던데요.”
“일본식 교육을 받아 정신까지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 아니냐?”
명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선 사람들이 빨리 깨우쳐서 독립하여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던데요.”
운현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얼버무렸다. 언젠가 배가 고파 과수원에 가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바쁠 때에는 인부들을 따라가서 심부름해주며 끼니를 해결했다. 그때 주인인 일본사람이 어린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애가 고생한다고 동정하면서 소학교에 다니라고 권했었다. 그 말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괴롭혔다.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일본 사람이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말을 해?”
명진은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뭉클해졌다.
“내 두 귀로 분명히 들었어요.”
운현은 용기를 얻어 힘주어 대답했다.
“일본 사람이라고 다 똑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말을 남이 듣는 데에서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다시는 꺼내지도 말아라!”
명진은 눈을 부릅뜨고 자식을 응시하며 꾸짖었다. 순사에게 붙잡혀 갈 것만 같아 불안했다. 누군가 뒤에서 목덜미를 잡아채갈 것만 같았다.
“알았습니다. 소학교는 보내주시는 거죠?”
운현은 아버지를 압박하며 김칫국물부터 마셨다,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고자품으로 식량을 구해야 할 텐데….”
명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식에게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먼산바라기를 했다. 어느새 눈 가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학교는 다니지 못할지라도 문턱이라도 한 번 밟아봤으면….”
운현은 토라져 생떼거리를 했다.
“남들은 일본 놈들이 자기들 방법으로 쇠뇌교육을 시켜서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짓된 신학이라고 하던데….”
“그건 그 사람들의 생각이겠지요.”
“아는 것이 재산이고 힘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맞아요. 적도 알아야 이기니까.”
운현은 고개를 숙이며 사립문을 나가려고 했다. 가정 형편상 소학교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성질이 났다.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할 수가 없었기에 자신에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침에 어디 가려고? 외양간에 가서 소죽을 쒀 소에게 먹여야지. 외양간두엄도 가득 찼더라. 빨리 쳐내야 돼”
명진은 아들의 뒤통수에 망치질을 해댔다.
“공부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시기를 놓치면 소학교에 다일 수 없다고….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면 머슴살이라도 해서….”
운현은 힐끗 돌아보며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소학교에 다닐 수만 있다면 남의집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허 참, 별놈 다 있네. 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학교는 무슨 놈의 학교!”
명진은 운현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분풀이를 자식에게 하고 있었다.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말 못한 부모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한 아들이 야속스러웠다.〈다음주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