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표 소설가의 신작 대하소설 『흐느끼는 하늘과 땅』 연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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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표 소설가의 신작 대하소설 『흐느끼는 하늘과 땅』 연재6
  • 장강뉴스
  • 승인 2025.03.1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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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2

사람들은 달포 전부터 설 준비로 바빠졌다. 설빔을 마련하느라 새 베를 누이었다. 섣달의 긴긴밤에 다듬이질 소리가 이슥한 밤중까지 이어졌다. 콩나물을 기르고 산나물이나 색다른 먹을거리를 마련하려고 분주하게 나대었다.

설을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한 해가 저물어갔다. 나라는 일본에게 빼앗겼어도 새해는 다가오고 있었다.

대목장날에 장작이나 아껴두었던 곡식을 팔아 과일, 생선, 도라지 같은 제찬을 마련했다. 그믐날이 다가오자 가래떡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납작납작하게 썰어 놓았다. 인절미나 백설기도 준비했다.

“오늘은 섣달 그믐날인데. 뒷집에서 돼지를 잡는다고 했지.”

홍명진은 서둘러 아침 일찍이 사립문을 나갔다. 서 근 되는 짚으로 묶은 돼지의 쟁기고기를 손에 들고 왔다. 돼지고기를 삶아 국을 끓였다. 생선을 굽고 나물들도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지만 갖은 정성을 들여 몇 가지의 음식을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믐날밤에 잠을 자지 않고 사랑방에서 뜬눈으로 새웠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정담을 나누었다. 새해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삶을 설계했다.

새해에는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다. 굶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자정이 지나자 금년에는 독립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설레었다.

‘올해는 침략자의 일본을 쫓아내고 자주권을 찾아야 한다.’

명진은 닭의 회치는 소리를 듣고 사랑방에서 나왔다.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었다. 압박과 서러움에서 행방 된 민족을 상상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독립을 해야 살아갈 희망이 생겨!’

명진은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소삽한 고샅을 더듬거리며 집으로 갔다. 면도날 같은 밤바람이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차례를 지내려면 준비해야 돼.”

명진은 꼭두새벽에 사랑방에서 돌아와 아내를 깨웠다.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행동댁은 설날 새벽에 썰어놓은 가래떡으로 떡 죽을 쑤었다.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을 들렸다. 가진 솜씨를 부려 마련한 조촐한 음식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조상님께 세배 드리자.”

명진은 어린 자식들을 깨워 모아놓고 차례를 지냈다. 새해에도 가족의 건강과 풍년과 행복을 기원했다. 마음속으로는 침략자의 일본을 몰아내달라고 애걸했다.

조국이 독립하도록 해달라고 눈물을 흘렸다. 국민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빌고 또 빌었었다. 지난해에 길쌈하여 만든 생베를 누이었다.

홍두깨에 말아 방망이로 두들겨 다듬이질하여 곱게 다듬었다. 마름질하여 솜씨를 부려 맵시 있게 만든 진솔의 설빔을 차려입었다. 조상님에게 정성들여 세배를 드렸다.

“너희들도 할머니께 세배 해야지.”

홍명진은 어머니께 세배를 하고나서 장손인 운현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세배를 드려야지요.”

운현은 할머니 앞으로 갔다.

“운현, 순조, 성지, 덕자의 순서대로 서야지.”

명진은 자식들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지난 한 해였다. 또 새해를 맞았다.

금년에도 가족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을 쳐야 되었다. 지난해 보다 더 잘살 거라는 기대와 희망 속에서 설날을 맞이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출발하지만 기대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캄캄한 절망 속에서 허덕이며 발버둥 처야 되었다.

새해에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으로 위로하고 있었다. 꿈과 현실은 다르지만 환상에 젖어 행복해지고 싶었다. 인간에게 희망이 없으면 곧 죽음이었다.

“할머니께 세배 올리자.”

운현은 나란히 서 있는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자식들을 잘 길러야 하는데….’

명진은 자식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좋은 옷이나 기름진 음식은 먹이지 못할지라도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할머니께 세배.”

운현은 꿇어앉으며 동생들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세배 받으셔야지오.”

운현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해야지. 당신도 이리 와요.”

명진은 자리 잡고 앉았다. 아내를 부르며 옆 자리를 가리켰다.

“당신만 받아요.”

행동댁은 쑥스러워 부엌으로 나가버렸다.

“어서 세배해라.”

명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운현은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께 큰절을 하고나서 꿇어앉았다.

“건강하고 복 많이 받아라. 운현이는 집안 장손이고 큰아들이니 금년부터는 가족을 위해 무언가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할 텐데…?”

명진은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봐야지요.”

운현은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부모님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품팔이, 품앗이, 고자품, 배메기농사, 소, 돼지, 닭 같은 짐승 기르기 등의 일을 하지만 집안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지새우며 새끼를 꼽고 가마니를 짜고 이엉을 역었다. 어려움, 고통, 괴로움, 역경, 배고픔, 같은 불행한 일들을 즐기는 것 같았다.

“소의 꼴이라도 열심히 베어 나르면 돼.”

명진은 소를 잘 기르면 살림밑천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동네 앞 논 두 마지기와 냇가 대밭 옆 논 두마지기의 농사로는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뭇갈림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지주에게 바치고 공출로 빼앗기고 나면 남은 것이 없었다. 배메기농사도 한두 해 짓고 나면 지주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다.

먹을거리가 없을 때에는 부잣집 고지농사를 지어주겠다고 하여 고자품으로 식량을 가져왔다. 비렁뱅이가 되어 얻어먹으나 다를 바 없었다. 가족은 각설이처럼 빌어먹으며 겨우겨우 연명해가고 있었다.

보릿고개가 되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영락없는 거지였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집만은 아니었다.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어렵게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이제는 이골이 났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고 있었다.

“알았습니다.”

운현은 소를 잘 기르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다. 남의 집에 머슴살이를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부잣집에서 밥만 먹기로 하고 일해 주는 남의집살이를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죽지 못해 간신이 목숨만 유지하고 있었다.

“죽을 먹자. 떡 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으니까. 어서 자라서….”

명진은 윗목에 있는 상을 끌어당겨 방 가운데 놓았다. 자식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배가 불러오를 것 같았다. 설날이기 때문에 가능한 풍성한 먹을거리였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저절로 불렀다. 간신히 설빔은 마련하여 자식들에게 입혔다. 진솔옷을 입은 자식들을 보니 더욱 예뻤다. 방안에 황금으로 가득한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자식들의 몸에서 빛이 나 번쩍거렸다. 눈이 부셨다.

홍인표 소설가
홍인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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