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명지바람이 싣고 온 따뜻한 봄 날씨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했다. 살이 토실토실 오른 탐스러운 흐벅진 햇볕이 지상의 휑뎅그렁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왜 학교에를 다니려고 하느냐?”
조 선생은 운현에게 바투하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라 철이 없는 줄 알았는데 기특하여 참으로 예뻤다. 어른들은 신학문이라 하여 거부감을 느껴 외면하였다.
“공부하려고….”
“공부해서 무엇 하게?”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던데요. 지식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재산이고….”
“누가 그런 말을 하던?”
“서당에서 들었어요.”
“서당에서 누구에게?”
“훈장님도 그러시고 다른 형들도…. 일본 사람인 과수원 주인도 그랬어요.”
“일본 사람 과수원 주인이 무어라고 하던?”
“조선 사람들이 힘이 없고 무식해서 일본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았다고 했어요. 겉으로는 도와준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하던 데요.”
“과수원 주인이 그런 말을 해어?”
조 선생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선이 독립하여 주권을 찾으려면 배워서 알아야 되고 했어요. 새로운 기계문명을 받아들여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학교에 다니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네?”
“물론이지요. 학교에 다닌 것도 때가 있다고 했어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많이 배워서 훌륭한 사람도 되고 싶은데….”
“어린애가 속은 알토란같이 토실토실 여물었구나. 그런 말을 누구에게나 함부로 하면 안 될 텐데…?”
조 선생은 운현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요?”
“침략한 일본 놈들은 조선이 독립하는 걸 싫어하니까.”
“남의 나라를 빼앗아 놓고….”
“조선 사람을 종처럼 부려먹고 되는 대로 강탈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조 선생은 말끝을 흐렸다. 빼앗긴 조국을 생각하니 서러움이 북받쳤다. 기가 막혀 말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고 먼산바라기를 하였다. 하늘에서는 매 한 마리가 선회하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공출로 빼앗아 간다고 하던데….”
“그래 바로 그거란다.”
조 선생은 운현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새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눈이 흐릿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9
겨울방학이 끝나자마자 봄방학이 시작되었다. 개학하자마자 입학식을 하였다. 일학년이 들어오고 소학교의 한 학년이 끝났다. 일학년의 마지막 종례시간이었다. 몇 되지 않은 학생이 작은 교실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안아 있었다.
“홍운현!”
조 선생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예!”
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살이지?”
“열 한 살입니다.”
“내일 부터 2학년이 아니라 4학년으로 올라가도 되겠다.”
“예?”
“한 해 동안 공부하는 걸 보았는데 4학년으로 건너뛰어도 다른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됩니까?”
“실력이 있으니까.”
“소학교에서 한 학년 밖에 다니지 않았는데….”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네 놈의 머리로는 충분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괜찮을 거야.”
“배운 것도 없는데….”
“구구단도 외우고 주판도 잘 놓고 암산도 잘하고 일본말도 그 정도면 4학년 실력이 되고 남아.”
조 선생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림 형편이 어려운데 돈만 축낼 필요는 없었다. 실력이 그 정도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두 학년을 건너뛰어도 됩니까?”
운현은 부끄러워 고개 숙였다.
“그것은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일본어는 어떻게 배웠니?”
“배 밭 과수원에서 심부름하면서 일본인인 주인에게….”
운현은 칭찬을 들으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빨리 졸업하면 월사금도 덜 낼 것이고….”
조 선생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운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고말고.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뛰어날 거야.”
“그렇다면….”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많으니 동생 같은 애들과 함께 하는 것도 거북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따르기로 했다.
“선생님이 너에게 공부 잘했다는 상으로 선물 하나 줄까?”
조 선생은 생글거렸다.
“선물이요?”
“이 책 받아라. 삼국지야. 중국 역사소설인데 선생님을 생각하며 읽어봐. 네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야. 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책이다. 구하기가 힘들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틈나는 대로 읽어봐.”
조 선생은 책상 서랍에서 책 세 권을 꺼내어 주었다.
“세 권이나….”
운현은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서 받아. 내가 생각나거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읽어봐.”
조 선생은 운현의 손에 삼국지를 쥐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받아들며 허리를 굽혔다. 눈물이 나와 손등으로 쓱 닦았다.
“울긴 사내놈이!”
조 선생은 운현의 등을 어루만졌다. 학생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화단의 나뭇가지에서는 참새들이 앉아 교실을 들여다보았다.〈다음주에 계속〉
